전기차 시장, 정책 후퇴와 산업 재편 속 '캐즘' 직면
전기차(EV) 시장이 주요국의 정책 후퇴와 산업 구조 재편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캐즘(보급 정체 구간)'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으로 친환경 보조금을 전면 폐지하며 전기차 의무화를 철회했고, 유럽연합(EU)은 2035년 내연기관 판매 금지 방침을 사실상 백지화하며 규제 완화 기조로 선회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전동화 전략 재조정을 촉발했으며, 특히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에게 수조 원대 계약 해지라는 직격탄을 안겼다. 이와 함께 높은 전기차 가격, 충전 인프라 부족, 소비자의 주행거리 불안감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더해져 전기차 수요 둔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미국, 전기차 보조금 전면 폐지로 정책 후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인 2025년 1월 20일 서명한 '미국 에너지 활성화' 행정명령을 통해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정책을 전면 철회했다.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그린 뉴딜을 종식하고 전기차 의무화를 철회한다"고 선언하며, 바이든이 2030년까지 신차 판매의 50%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던 목표를 폐기했다. 행정명령에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인프라 법에 따라 책정된 전기차 보조금, 충전소 설치 보조금, 배터리 제조시설 지원금 등 연방정부 차원의 모든 전기차 지원을 즉각 중단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러한 조치는 미국의 기후 변화 대응 노력에 상당한 후퇴를 가져올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주가 연방보다 엄격한 대기질 기준을 독자적으로 설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권한도 철회했다. 미국 자동차 업계와 환경 단체는 물론 일부 공화당 의원들까지 이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나, 트럼프 행정부의 친화석연료·탈규제 기조는 향후 4년간 지속될 전망이다. 업계는 미국 내 전기차 판매 촉진 정책이 상당히 후퇴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미 포드·GM 등 미국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투자 규모를 축소하고 하이브리드·내연기관 비중을 다시 높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 중이다. 일례로 GM은 2025년까지 전기차 100만 대 생산 목표를 사실상 포기하고, 내연기관 차량 생산을 늘려 수익성 확보에 주력하겠다고 발표했다. 포드 역시 전기차 생산 증설 계획을 연기하고 하이브리드 모델 라인업을 강화하는 추세이다.
◆ EU, 2035년 내연기관 금지 철회…90% 감축으로 완화
유럽연합(EU) 역시 전기차 강제 전환 정책에서 한 발 물러섰다. EU 집행위원회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전면 금지하기로 한 방침을 철회하고, 일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 내연기관 차량 생산을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유럽의회 최대 회파인 유럽인민당(EPP)의 마누프레트 베버 대표는 2025년 12월 11일 독일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내연기관 차량의 신규 판매 금지 계획이 더 이상 추진되지 않는다"고 공식 확인했다. 이는 전기차 전환에 대한 유럽 내 일부 국가와 산업계의 반발, 그리고 'e-퓨얼(합성 연료)'과 같은 대안 기술 개발에 대한 고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새로운 규제안에 따르면, 2035년 이후 신규 등록 차량은 100% 배출 감축 의무가 아닌 제조사 전체 차량 평균 기준으로 2021년 대비 90% CO₂ 감축만 이행하면 된다. 이는 친환경 철강 사용이나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에 탑재되는 소형 엔진 생산 등 일부 조건 충족 시 휘발유·디젤 차량을 계속 생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35년 이후 금지 대상이었던 전기차 내 주행거리 연장용 소형 엔진 허용 방안도 논의되고 있어, EU의 기후 대응 법에서 상징적 조치로 여겨졌던 내연기관차 금지는 사실상 철회된 것이다. 이에 따라 BMW, 포르쉐 등 e-퓨얼 기술에 투자해온 자동차 제조사들은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수 있게 됐다.
다만 EU는 규제를 완화하면서도 소형 전기차 전용 M1E 세그먼트를 신설하고, 역내 생산 M1E 차량에 '슈퍼 크레딧(1대당 1.3크레딧)'을 부여해 저가 소형 전기차 보급은 계속 촉진할 계획이다. 이는 중국산 저가 전기차의 공세에 대응하면서도 유럽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려는 균형 전략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유럽 내 배터리 생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 유치 노력도 지속될 전망이다.
미국과 EU의 전기차 정책 후퇴는 국내 이차전지 업계에 즉각적인 타격을 입혔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5년 12월 17일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와 체결했던 9조6,030억 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셀·모듈 공급 계약이 해지됐다고 공시했다. 이는 LG에너지솔루션 최근 매출의 약 28.5%에 해당하는 규모로, 포드가 최근 정책 환경과 전기차 수요 전망 변화로 일부 전기차 모델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2027년 이후 공급 예정이던 75GWh 계약을 취소한 것이다. 포드는 특정 대형 전기 픽업트럭 모델의 생산 계획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불과 9일 뒤인 12월 26일에는 미국 배터리팩 제조업체 FBPS와 맺은 약 3조9,000억 원 규모 공급 계약도 추가 해지되며, LG에너지솔루션은 보름 사이 13조5,000억 원대 계약이 증발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양극재 제조사 엘앤에프 역시 테슬라와 체결한 3조8,000억 원 규모 공급 계약이 1,000만 원 수준으로 대폭 축소되며 사실상 계약 해지 상태가 됐다. 이는 테슬라가 차세대 배터리 도입 계획을 수정하고, 자체 배터리 생산 비중을 높이려는 전략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SK온을 포함한 국내 주요 배터리 3사가 한 달 새 받은 계약 해지 규모는 총 17조 원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배터리 업계에 투자 위축과 함께 생산 계획 재조정의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만 금융투자업계는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제조사 간 계약에 통상 약속한 수량만큼 구매하지 않을 경우 보상금을 지급하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어, LG에너지솔루션이 포드로부터 2조 원 규모의 보상금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LG에너지솔루션 측은 "고객사 전동화 전략 변경으로 특정 차량 모델 개발이 중단됨에 따라 공급 계약이 해지됐다"며 "포드와 중장기적 협력 관계는 지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배터리 기업들은 계약 해지에 따른 리스크를 관리하며,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생산 확대 및 고객사 다변화 등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 중국 전기차, 내수 둔화를 수출 확대로 보완
정책 불확실성 속에서도 중국은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는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전기차 보급률 50%를 넘긴 세계 최대 시장으로, 내수 성장 둔화를 해외 수출 확대로 보완하며 글로벌 시장 공세를 강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2025년 11월 기준 중국의 전기차 수출은 월간 19만9,836대를 기록했으며, 8월에는 21만3,809대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바 있다. 특히 BYD와 SAIC 등 중국 주요 전기차 제조사들은 유럽, 동남아시아, 중남미 시장에서 공격적인 마케팅과 현지 생산 투자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중국 전기차 수출의 새로운 주요 시장으로 부상했다. 중국 최대 전기차 업체 BYD가 2025년부터 한국에서 승용차 판매를 본격화하면서, 중국의 한국행 순수 전기차 수출 비중은 2023년 1%대에서 2024년 2%로 증가한 뒤 2025년에는 4.7%로 급증했다. 한국은 중국의 여섯 번째 전기차 수출 시장으로 떠올랐으며, 2025년 1~8월 중국 전기차의 대한국 수입액은 15억 달러(약 2조1,0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58%나 급증했다. 이는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전기차들이 국내 시장에서 빠르게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내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태국, 베트남, 호주, 중남미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으며, 2026년 1월 1일부터는 순수 전기 승용차에 대해 수출허가증 관리를 정식 시행해 전략적 수출 통제 체계를 구축한다. 중국 제조사 CATL은 테슬라,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 주요 완성차 업체와의 파트너십에 힘입어 2025년 355.2GWh 사용량으로 전년 대비 36.6% 성장하며 글로벌 1위를 유지하고 있다. CATL은 저가형 LFP 배터리부터 고성능 NCM 배터리까지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며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 시장 파편화와 지역별 맞춤 전략 시대
지역별 정책과 규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급속도로 파편화되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은 미국·유럽·중국 등 각 지역의 정책 환경에 맞춰 파워트레인, 플랫폼, 배터리 조달 전략을 따로 가져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온 자동차 산업의 기본 전제를 뒤흔들며 개발 및 생산 비용 부담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시장에서는 IRA 규정을 충족하는 북미 생산 배터리 및 부품을 사용해야 하고, 유럽에서는 탄소 배출 규제 완화에 따라 내연기관과의 병행 전략이 가능해졌으며, 중국에서는 현지 파트너십과 저가 모델 개발이 필수적이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는 이러한 파편화로 인해 단일 글로벌 전기차 플랫폼 전략이 어려워지고 있으며, 향후 전기차 성공의 핵심이 각 지역 규제와 수요에 맞추는 '지역 적응력'이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가트너는 미국의 수입 관세 부과, 주요국의 전기차 보조금 축소 등 부정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전기차 운행 대수가 2026년 1억1,600만 대로 전년 대비 30%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정책 변화가 단기적 충격을 주지만 장기적인 전환 추세는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블룸버그 뉴에너지 파이낸스(BNEF) 역시 2026년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전년 대비 약 20% 성장해 연말까지 2,140만 대의 판매량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SNE 리서치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은 933.5GWh에 달해 전년 대비 35.2%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전기차(PHEV) 운행 대수도 2026년 기준 전년 대비 32% 증가할 전망이다. 이처럼 전반적인 성장세는 유지될 것이나, 그 과정에서 지역별 격차와 시장의 변동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 장기 전환 기조는 유지, 속도 조절이 핵심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 정책 후퇴와 투자 축소, 비용 증가로 전기차 시장이 캐즘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지만, 내연기관 대비 기술·환경 우위와 EU·중국의 지속적인 보급 정책으로 전기차 전환 자체가 꺾인 것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한국 시장의 경우 2025년 전기차(BEV) 판매 비중은 약 12% 내외로 예상되며, 2026년에는 15~18% 수준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정책 방향과 충전 인프라 확충 속도가 국내 시장 성장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전자신문은 "2026년 파워트레인별로 전기차 수요가 2,000만 대를 넘어설 것이며, 미국 수요는 주춤하더라도 중국·유럽·인도 등 다른 국가 수요 증가에 힘입어 증가세를 유지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다만 내연기관차 수요는 지속 감소하고 하이브리드차 수요는 증가하겠지만,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PHEV) 수요는 기세가 꺾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는 순수 전기차의 가격 경쟁력 강화와 충전 인프라 개선이 이뤄질 경우 PHEV의 중간 단계로서의 역할이 약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전기차 시장은 전면 전환에서 속도와 경로를 재조정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각 지역의 정책 방향과 소비자 수요 변화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응하느냐가 제조사와 배터리 업체의 생존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SNE 리서치는 "2025년 말까지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지속적인 수요 증가를 경험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지역 정책 환경의 변화와 기술 전략의 재편으로 경쟁 구도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시장의 변화 속에서 기업들은 효율적인 비용 관리, 기술 혁신, 그리고 지역 맞춤형 전략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